굿판 뒤의 권력 굿판의 그림자 아래 움직인 권력들
조선 말 진령군과 제정 러시아의 라스푸틴은 모두 무속을 기반으로 정치 권력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윤석열 정권에서 김건희의 무속 논란은 이 역사적 비극과 어떤 공통점을 갖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굿판은, 권력의 통로였다
대선을 앞둔 2021년, 김건희의 굿판 논란과 무속 고문 위촉 사건은 단순한 개인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국정농단 사례는 조선 말기에도 존재했습니다.
바로 무속인, 진령군(眞靈君)으로 불린 인물입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 제정 러시아에도, 황실을 무너뜨린 무속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레고리 라스푸틴입니다.
진령군의 등장 : 임오군란과 충주의 운명적 만남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명성황후)는 궁녀로 변장해 충주까지 피신합니다.
그곳에서 만난 무당 진령군은 “8월 보름 환궁”을 예언했고, 청나라의 개입으로 이 예언은 현실이 됩니다.
이후 진령군은 창덕궁에 입성, 고종으로부터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하사받습니다.
이는 천민 출신 여성이 왕실 작위를 받은 초유의 사례였고, 무속이 곧 권력이 되는 시대가 열린 신호탄이었습니다.
무속이 정치에 개입 할 때 : 진령군의 권력과 재물
진령군은 자신을 관우의 딸이라 칭하며, 종로 명륜동에 관묘(북묘)를 세웁니다.
고종은 이를 공식 승인했고, 북묘는 정치 청탁과 줄서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수양아들인 이유인과 함께 매관매직, 국정 간섭, 궁중 굿판을 벌이며 백성의 고혈을 짜냈습니다.
- 순종의 병을 고친다는 명분으로 금강산 1만 2천 봉마다 쌀과 돈을 바치게 했고,
- 민비는 이를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 국고는 파탄났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고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야 민심이 풀릴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 권력을 잃은 무속인의 최후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되자, 그녀의 후광을 입던 진령군 역시 체포됩니다.
곧이어 거열형(몸을 찢는 사형)에 처해졌고, 수양아들 이유인은 유배 후 사망합니다.
진령군의 몰락은 무속과 정치의 유착이 국가적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진령군과 라스푸틴, 김건희와의 3자 비교
항목 | 진령군 (박창렬) | 라스푸틴 | 김건희 |
---|---|---|---|
출신 | 충주 무속인 | 시베리아 농민 | ? |
권력 진입 | 임오군란 후 민비 환궁 예언 → 궁 입성 | 황태자 병 치유 → 황후 신임 | 굿판·무속인과의 관계 → 캠프 비선 연루 |
정치 영향 | 매관매직, 북묘 설치, 국정 간섭 | 장관 해임, 정책 간섭, 내각 개입 | 무속 고문 위촉, 인사개입 의혹, 팬클럽 인사 |
민심 반응 | 실록에 탄핵 상소 다수, 민심 이반 | 귀족과 민중의 반발, 황실 불신 확대 | 언론 비판, 국민 불신, 재판 중 |
최후 | 을미사변 후 거열형 | 귀족의 음모로 암살 | 현재 수사·재판 중 (진행형) |
과거의 비극, 오늘의 경고
진령군과 라스푸틴은 무속이 권력의 중심으로 침투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역사로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 결과는 왕실과 제국의 몰락, 그리고 국민의 절망이었습니다.
김건희의 굿판과 무속 논란도 단지 사적 신앙의 문제로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국정은 합리성과 투명성 위에 서야 하며, 보이지 않는 비선과 주술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
민주주의의 기반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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